무교병이야기

  지난 겨울들판,

망각 속에 묻혀있던 기억 하나를 찾아내었다.

어떻게 그렇게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내 인생행로를 바꾸게 한 책,

칠십원짜리 삼성문화문고 김태길 교수의 인간회복서장,

돈이 모든 가치의 척도이고 생존의 전제조건인 이 각자도생의 시대에서는

오히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오십여년 전 내가 아직 십대였을 때

황금만능주의. 가치전도와 인간성을 상실한 사회현실을 지적한 그 책의 내용은

온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큰 충격을 주었다.
유교적 교육과 선비정신,

그리고 열여섯살부터 읽기 시작한 채근담의 자세가 기본 가치였던 아직 순수했던

십대의 나에게 준 절망감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어떻게 세상이 이렇게 될 수가 있는 것인지 괴로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소설가가 되는 게 꿈이기도 했고, 고시공부도 해보고 싶었던

아직 꿈 많았던 나는 결국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리어카를 선택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지 모든 이의 가슴에 감동으로 남을 만한

작품을 힘있고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모자라고 멍청하고 미련하게 살아온 내 인생 여정의 시작이었다.

 
공부는 커녕 먹고살기도 힘들었던 그 시절

서울 변두리 촌동네, 또래의 아이들이 빈둥대며 놀고 있을 때

병약해 보이고 공부만 하는 그 샌님같은 아무개 아들이 집안이 어려운 것도 아닌데

어느날 갑자기 리어카를 끈다는 소문에 일부러 집까지 찾아와

내 손을 잡아주며 격려해 주셨던 동네 어른들의 그 따뜻한 목소리,

그리고 중앙일보사 현관 수위실에서 칠십원짜리 그 문고본 책들을
받아 들었을 때의 그 감격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당시 십대였던 나는, 나를 격려해주기 위해서 찾아오셨던

동네 어른들보다 이제는 훨씬 더 많은 나이가 되었다.

자네는 꼭 성공할 걸세.
오셨던 분들 모두 똑같은 말씀을 해주셨다.

 
  훌쩍 지나간 50여년 세월,

사과를 싣고 나간 첫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팔지 못하고 거의 그대로 다시 싣고

들어왔던 기억이 떠오른다. 개봉동에서 용산시장까지 매일 리어카를 끌고 가서

물건을 실어와 팔았다. 그 정도 거리를 매일 리어카로 다닌 사람은 아마도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었을 거였다. 아이들 소풍때는 장난감 보따리를

둘러메고 쫓아 다녔고, 겨울에는 풀빵 장사도 했고, 발로 돌리는 솜사탕 장사도 했다.

그러나 그 시간들이 온전히 육화되지는 못했다. 그때까지 내 의식은 밑바닥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삶과 의식이 온전히 밑바닥에 놓이게 된 것은 막장까지 몰린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면서부터였다.

  
   장사를 시작한지 육년여쯤 지나 리어카에 고물 잡동사니 몇개를 싣고 무작정 들어간

왕십리 중앙시장, 삼개월 만에 반평짜리 노점자리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돈이 쉽게

벌리던 그곳, 저녁 늦게 어쩌다 들린 붉은 조명의 조그만 술집, 그런 분위기에 중독되고

정에 이끌려 나도 모르는 사이 끝없이 이어진 방탕과 타락, 막장에 몰리고 간신히

정신을 차렸지만, 정작 혼란과 고통은 그 뒤에 몰려왔다.

수치심과 자괴감,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 그 모든 것이 엉망으로 엉킨 채 지독한

독감에 걸린 것처럼 죽을 것만 같은 고통으로 다가왔다.

살기위해 펼쳐든 성경책, 한눈에 들어왔던 다윗의 시편들, 읽자마자 눈물이 쏟아졌고

곧 통곡으로 변했다. 차마 용서를 구할 기도조차 드릴 수 없어 그 시편들을 통곡하며

읽고 읽고 또 읽었다.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면 다시 통곡하며 그 시편들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러다 정신을 잃었고 그 밤에 꾼 기이한 꿈, 너무 생생했지만 그 의미를

알 수 없어 살아오면서 평생 의문으로 남았던 꿈. 잠에서 깨어나자 신기하게도 나를

짓눌렸던 그 모든 고통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온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워져 있었다.

바람이 상쾌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다시 장사에 열중하게 되자,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와 함께 갑자기 들기 시작한

돈을, 떼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 돈이라는 걸 어떻게 벌어서 어떻게 쓰는 것인지,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하는 성귀를, 그리고 제게 더 큰 시련을 주셔서 저를 단련시켜

주십시오 하는 말을 하루에도 수십번, 아니 수백번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아무도 취급하는 사람이 없어서 시작한 중고 타자기 장사, 나는 정직하게 장사했고

손님과의 약속을 지키려 애썼다. 짧지 않은 시간동안 방탕한 생활을 하느라 장사를 등한히

했지만 그동안 소문이 전국으로 퍼져 있었고 사람들은 나를 애타게 찾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먼 진도의 작은 교회에서, 백령도에서, 그리고 최전방 부대에서도 찾아오고 연락이 왔다.

손님들은 그들이 필요한 모든 것, 각종 가전제품은 물론 가구, 집기까지 모두 나를 통해

구입하고 싶어 했다. 당장 십층짜리 건물 하나를 통째로 사용해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돈이 널려있는 게 눈에 보였고, 나같은 똑같은 몸뚱아리 하나만 더 있어도 매일 용달로

돈을 쓸어 담을 것만 같았다. 오년내 신흥재벌이 될 거라고, 또 어떤 분은 신화를 쓸 거라고

말해주는 분도 있었다.

  그 무렵, 늦은 오후까지 아침도 먹지 못한 채 탈진해 있는 나를 딱하게 여겨 한 손님이

직접 쪄서 가져다 준 무교병이라는 통밀떡 한덩이, 홍해바다를 가르는 기적을 일으켜서

자신의 백성을 구해내신 하느님께서 그 일을 기념해서 직접 자신의 백성에게 세세토록

먹을 것은 명령하신 음식이니 얼마나 좋겠느냐며 내게 꼭 먹을 것을 간곡히 간곡히

당부하고 가셨던 분, 거리에 버려진,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 그 분들보다

더 낮은 자리에서 그분들을 섬기고 계셨던 분, 지금도 LA에서 여전히 그렇게 살고 계시는 분,

그날 이후로 다시는 뵐 수 없었지만 그분이 가져다 준 볼품없는, 성경에서 말하는 무교병이라는,

그 통밀떡 한덩이가 불과 일년여 뒤 내 남은 인생여정을 송두리째 바꾸게 할지

그때는 어떻게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 시장에 돈 사만원을 들고 들어간 지 일년도 안되어 신축건물의 이층 반을 얻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늦은 오후까지 아침도 먹지 못할 정도로 쉴 새 없이 찾아오는 손님들과

두 대의 전화기에서 끊임없이 울려대는 벨소리, 저녁에는 꼬박꼬박 찍어야 하는 일수,

내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상황이었다.

그 한계를 극복할,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한번 만나기도 힘든 기회가 두 번씩이나

찾아왔지만 나는 그대로 흘려보냈고, 해보고 싶었던 것도 많았고 미련도 너무 컸지만.

내 돈이 아니면 다시는 사업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대로 사업을 접고 말았다.

더 이상 끌고 나가면 영영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았고 사람 꼴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 였다.

내 능력의 한계도 절감했지만 잘못해서 실패하면 사기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서 였다.

너를 도와주지 못해 정말 미안하구나.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셨던 아버지께서 그 무렵

처음으로 하셨던 그 말씀이 두고두고 가슴을 아프게 했다.

  손에 잡힐 것같이 바로 눈앞에 보였던 그 꿈을 스스로 접었기에 그 총격은 아주 오래도록

나를 힘들게 했다. 아니 처음 몇년 동안은 완전 바보가 되어버렸다. 아무 생각도

그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또 무슨 어떤 꿈을 꿀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 결정이

내 생명을 구한 결정이자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었음을 온전히 깨닫는 데는

이십 오년여의 시간이 필요했다.

   집에서 얼마간 정신나가 사람처럼 지내다가 다시 글을 써보기 위해 연고도 없이 무작정

내려간 김천 연화지 근처에서 시작한 자취, 무교병이라는 그 통밀떡을 전해주시며 간곡히

간곡히 당부하고 가셨던 그 마음을 나는 잊지 않고 고맙게 간직하고 있었다. 지금 아니면

영원히 실천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시내 잡곡상에서 어렵게 통밀을 구해와 먹기 시작한

그 무교병이라는 통밀떡이 그 뒤 내 몸에 일으킨 변화는 하루하루 경이로움의 연속이었다.

속 편하다는 우리말의 진정한 뜻을 처음으로 깨닫게 해주었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상상도 못했던 세상, 다시 한번 더 눈을 감았다 뜨고 또 다시 보아도 세상은

왜 이렇게 눈물겹도록 아름답고 감사한 것인지, 스물아홉 내 인생이 얼마나 헛살아왔는지

가슴이 아플 정도로 후회스럽고 후회스럽고 또 후회스러웠다.

   집안일 때문에 삼개월여만에 다시 서울로 올라온 나는 틈나는 대로 자연식과 자연치유에

관한 서적들을 찾아 읽기 시작하며 음식과 질병치유에 대해 조금씩 눈을 떠가기 시작했다.

가족들과 생활하면서, 그리고 막노동을 하면서 일상적 식생활로 돌아갔고 시간이 지나자

다시 속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농가에 보급할 종자도 부족하던 ‘우리밀 되살리기 운동본부’

초창기 시절, 동교동 사무실에 찾아가 어렵게 부탁해 구해온 통밀을 씼고 며칠동안 말려서

빻아온 통밀가루를 정작 나는 얼마 먹지 못하고 주위의 아픈 분들께 나누어 드리곤 했다.

십여년 꾸준히 책들을 읽어가며 내 몸으로 실험하고 관찰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현대인들이 겪는 병들의 원인과 또 어떻게 해야 치유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문명사에 기념비적인 문서로 평가받는 거의 오십년전에 발표된 맥거번 리포트가 내린 결론,

현대인의 병은 식원병 즉 잘못된 식생활에서 오는 것이며, 그 한해 전에 우리나라에서

발간된 정사영 박사의 ‘기적을 낳는 현미’라는 책이 그 실증적 답이었다.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하신 성경의 말씀이 선사시대 어느 동글에 적혀있는 글씨가 아니라

살아있는 하느님 말씀으로 다가오기 시작했고, 맥거번 리프트의 인류는 현재의

식생활을 바꾸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경고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성경의 그 말씀을 붙잡고 살아갈수록 처음에는 내게 빛으로 희망으로 기쁨으로 다가왔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세상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점점 더 큰 절망으로 다가왔다.

그 절망은 내가 십대때 느꼈던 절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절대적

절망감이었다. 그러나 그 절대적 절망감이 늦은 나이에 얻은 내 아들과 함께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내게 하고 감사함을 잃지 않게 하는 힘이 되었다.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 고단했던 오십여년 세월, 하루하루 순간에 매몰되며 어쩌다

지나가 버린 그 시간들, 인생 말년에 닥친 두번의 화재, 그 긴 여정의 끝에 깨닫게 된 것은,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에는 우리가 거룩하게 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담겨있고,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양식으로 받은 우리가 바로 하느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이었다.

  사십여년전 무교병이라는 그 한덩이 통밀떡이,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인지

찾아 나섰던, 모자라고 멍청하고 미련한 나에게 주어진 축복의 선물이었다.